단편소설

제 7병동

카인과 아벨k 2024. 1. 3.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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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 가는 길
새벽의 기차역 대합실은 이른 아침 단잠을 깨고 나온 사람들의 피곤함이 낡은 의자에서 마른 먼지처럼 폴폴 피어오르고 있다. 졸음을 깨우며 저 멀리서 충북선열차의 경적소리가 푸른 안개를 헤치고 나직이 들려온다. 일순, 사람들은 자리에서 부스스 무의식적으로 일어나 플랫폼으로 빨려 들어가듯 하나. 둘 모습을 감춘다.     
  창문밖으로 스쳐지나가는 초가을의 고즈넉한 풍광을 무심히 바라보다 불현듯, 유년시절 덜컹대는 밤기차를 타고 무작정 부모님 손에 이끌리어 영문도 모른 채 고향을 떠났던 흐릿한 기억을 좇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 까. 레일 위를 쉬임 없이 달리던 기차는 단종애사의 비운을 싣고 말없이 흐르는 동강에 다다르고 있었다. 어린 시절의 기억들이 칙칙한 흑백영화의 필름처럼 흐릿한데 바람에 하늘거리는 분홍빛 코스모스는 해맑게 곱기만 하다. 나는 지금 영월 옥동광업소에서 일을 하다 '진폐'라는 몹쓸 병을 얻어 오랫동안 병상 생활 끝에 길지 않은 삶을 마감한 아버지의 유족연금서류를 접수하기 위해 가는 길이다. 
  서울에서 크게 벌였던 사업이 실패로 돌아가자 막다른 골목에 몰린 아버지는 잠시 이 곳 영월로 들어오게 되었다. 적수공권의 아버지가 만만하게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채탄을 하는 단순노무 외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더 이상 아무것도 잃을 게 없는 아득한 절망은 수 백 미터나 내려가는 지하갱도, 그 어둠의 공포보다 적지는 않았을 것이다. 낡은 버팀목이 부러지거나 약한 지반이 붕괴되어 갱도가 막히는 날엔 하루아침에 목숨을 잃고 마는 안타까운 사고도 끊이지 않았다. 지금은 겨울철 연탄소비가 줄어들면서 폐광이 급격히 늘어났지만 그 시절만 해도 작은 산골마을 아저씨들 대부분이 탄광에서 일할 정도로 광산업은 호황을 누렸다. 채탄일을 마치고 나면 광부들은 목에 낀 탄가루를 씻어낸다고 삼겹살에 소주를 즐겨 들었다. 그래서 탄광촌 주변 선술집은 늘 밤이 늦도록 사람들로 북적거렸고 사내들은 하루의 고달픔을 술잔 속에 왁자지껄 풀어놓았다. 어느 정도 취기가 오르면 상다리가 부러져라 젓가락을 두들기고 망향의 노래를 고래고래 불러대며 삶의 애환을 토해냈다. 밤이 깊어가는 탄광촌에 별이 높게 뜨면 긴 그림자를 힘겹게 이끌고 비틀거리며 집으로 돌아 가는 사람들의 어두운 군상 群像들, 유년의 기억은 늘 희미한 회색빛 물감으로 채색한 듯 한 마을과 탄가루가 묻어 아프리카 토인으로 변한 것 같은 사람들의 검은 얼굴부터 떠오르곤 한다. 
 오랜 시간이 흘러 다시 찾은 작은 도시는 낯설기만하다. 덧칠한 캔버스의 유화처럼 시간의 강물은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다. 역에서 내린 나는 오랜 여행 탓인 지 가벼운 현기증이 났다. 가을 햇살이 한가히 비치는 근로복지공단 사무실에 들어서니 사무적인 말투의 여직원이 무표정한 얼굴로 맞아준다. 준비해 간 서류를 넘겨주고 형식적인 대화가 오고 갔다. 볼일을 마치고 딱히, 서두를 이유가 없는 나는 시장으로 향했다. 때를 넘기고  나니 허기도 밀려왔고 오래간만에 시장구경도 할 겸 발길을 옮기다 허름한 국밥집으로 들어갔다. 주인 할머니는 인정 넘치게 푸짐한 국밥 한 상을 차려내었다. 소주 한 병을 시켜 혼자 궁상맞게 소주잔을 들이켠다. 긴장이 풀어진 탓인지 알싸한 알코올 기운이 폐부를 자극한다. 생경스러운 시장을 나와 다시 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따갑게 내리쬐던 햇살이 잿빛구름에 가려있고 습한 바람이 불어와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것 같다. 낮술을 해서일까, 나는 약간의 미열이 있었고 열차에 오르자마자 의자 깊숙이 몸을 던지고 또다시 깊은 심연의 잠 속으로 가라앉았다. 계속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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