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여행기

비둘기호의 추억

카인과 아벨k 2022. 7. 23.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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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산한 바람이 나목에 매달린 마른 잎새를 떨구고 마른 갈대숲 위로 철새들이 비행에 한창인 늦가을의 풍경은 쓸쓸한 우수를 자아낸다. 가을 햇살이 들어오는 작은 카페에서 향기 좋은 커피 한 잔을 마시며 멈춰버린 시계태엽처럼 마음껏 게으름에 취해본다. 젊은이는 늘 꿈을 먹고살고 노인은 추억으로 삶의 위안을 삼는다고 하는 데 어정쩡한 나는 무엇으로 삶의 의미를 찾을까. 이 맘 때면 또 다른 세상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기 위해 어디론가 떠나는 버릇이 재발한다. 지금도 가끔 기차를 이용할 때가 있지만 예전 비둘기호의 추억은 각별한 애틋함으로 남아있다. 급할 것 없이 천천히 달리던 비둘기호는 이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폐선이 된 지 오래지만 경남 진주에서 하동쯤으로 다니던 완행 비둘기호는 꾸밈없는 산골처녀처럼 수수한 모습이었다. 요즘이야 ktx 고속열차가 300km를 질주하고 있는 시대가 되었지만 어쩐지 기차여행의 낭만은 조금은 느리게 가는 게 제 맛인 것 같다. 느릿하게 달리는 비둘기호는 간이역마다 정차하면서 시골 아낙의 고달픈 애환을 실어 나르며 문명과 오지를 이어주는 끈이 되어 주었다. 오일장이 서는 날이면 산에서 나는 산채나물, 텃밭에서 정성껏 키운 푸성귀, 제철마다 열리는 과일을 광주리며 보따리에 이고 들며 기차 오기만을 눈이 빠져라 기다렸다. 때로는 엄마품이 그리울만한 앙증맞은 강아지를 종이상자에 넣어오기도 하고 토종닭은 팔러 가기도 하였다. 순식간에 기차 안은 마치, 시골장터를 옮겨놓은 것처럼 왁자지껄하였고 한담을 나누는 촌로들은 순박하기 그지없는 우리의 어머니, 할머니의 모습 그대로였다. 자연에 순응하며 자연이 베푸는 만큼 욕심 없이 땅을 일구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검게 그을린 얼굴에는 삶의 고달픔을 순박한 웃음으로 넘기는 지혜가 숨어있었다. 교복을 입은 여학생들은 무엇이 그리 재미있는지 삼삼오오 모여 깔깔거리며 끊임없이 조잘거렸다. 짓궂은 남학생들은 겁도 없이 무임승차하려다 험한 인상의 검표원에게 적발되어 혼나기 일쑤였다. 작은 간이역은 슬픈 이별과 반가운 해후가 교차하는 얄궂은 곳이기도 하였다. 명절이 되면 객지에 나가 있는 자식을 하염없이 기다리며 대보름달을 바라보며 소원을 빌던 어머니의 눈물이 있었고 보따리마다 가득 싸 보내면서 열차가 산모퉁이를 돌아 사라질 때까지 눈길을 거두지 못하기도 하였다. 문명의 진보는 하루가 다르게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고 있지만 빠름과 느림이 적당히 조화를 이루었으면 하는 바람이 공허하게 메아리친다. 가을 들녘을 가로지르는 기차는 어느덧 옛 추억으로 달려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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